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-프랑스 전쟁 (문단 편집) ==== 이탈리아와의 적대 ==== 이탈리아 원정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[[이탈리아 통일]]의 주역인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의 대(對)오스트리아전을 지원한 것이었으므로 [[이탈리아 왕국]]은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의 덕을 봤다고 할 수도 있다.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그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중간에 사르데냐-피에몬테를 버리고 [[프란츠 요제프 1세]]와 독자적으로 휴전해 버렸으며 이 때문에 사르데냐-피에몬테의 수상 [[카밀로 카보우르]]는 프랑스와의 조약의 파기를 고려할 정도로 분노하였다. 프랑스의 사르데냐-피에몬테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고 사르데냐-피에몬테가 니차(Nizza, 현 프랑스 [[니스]])와 [[사보이아 가문|왕실]]의 시초였던 [[사부아|사보이아]]를 할양받는 대가로 참전한 것이었는데 니차와 사보이아는 고스란히 집어삼킨 주제에[* 이탈리아가 [[비시 프랑스]] 때 [[이탈리아 점령하 프랑스|집적거린 적]]이 있긴 하지만 이 지역들은 현재까지도 프랑스령이다. 니차와 사보이아 할양은 전쟁 전의 약속이었지만 프랑스가 멋대로 전쟁에서 이탈하여 약속을 파기했기 때문에 굳이 지킬 필요는 없었다. 허나 전쟁이 끝난 지 1년 뒤 토리노 조약으로 [[교황령]]을 제외한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하는 대신 니차와 사보이아를 할양했다.] 전쟁에서는 중간에 마음대로 발을 뺐으니 [[이탈리아인]]들이 분노한 것도 당연했다. 게다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때 프로이센과도 동맹을 맺은 상태였으니 어차피 프랑스를 도울 가망은 없었다. 도리어 이탈리아 국내 여론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[[교황령]]을 완전히 확보하길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적대적인 편이었고 [[주세페 가리발디]]가 이끄는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교황령을 공격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